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문단 편집) === 북로군의 상황(상간하다 전투) === 한편, 북로군의 지휘자는 마림이었고, 두송군이 전멸한 날인 3월 1일 밤 상간하다(尚間崖)에 도착했다. 북로군의 경우, 본대는 지휘관 마림이 지휘했고 병력은 19,000여 명이었으며, 각각 5,000명의 병력을 가진 두 분대를 범종안(范宗顏)과 공연수(龔年遂)가 이끌고 있었다. 마림은 문신 출신이라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범종안은 두송과 같은 성향의 인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본대를 이끌고 있었던 마림과 사이가 나빠서 돕지 않았다고 한다. 마림도 밤에 두송의 참패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상간하다의 주둔지에서 밤새 거마작[* 대기병 목책을 말한다.]을 둘러싸며 기습에 대비했고, 그 뒤에 [[대포]]를 배치하면서 외곽에 밀집 대형의 기병을 세워 철저한 방비에 나섰다. 범종안과 공연수는 각각 본대의 양 측면에 배치되어 적이 다가오면 협공을 하려고 했다. 범종안은 상간하다에서 동쪽으로 1km 떨어진 비분산에 주둔하여 한쪽이 공격을 받으면 호각의 세로 원조를 하려고 했다. 이들을 노리고 있는 후금군의 군세는 다이샨이 이끌고 있는 부대로서, 다이샨은 정홍기와 양홍기 두 부대, 총병력 15,000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다이샨은 일단 300명의 정찰부대를 파견해 적진을 파악했다. 3월 2일 아침, 마림이 구축한 북로군 진영이 예상보다 견고한 듯 하자, 다이샨은 동생 홍타이지가 이끄는 정백기 및 전날 두송군을 격파하고 패잔병을 살육하고 있었던 부친 누르하치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누르하치는 두송 부대의 패잔병 2,000명을 1,000명으로 섬멸하고 있었다. 그때 아들 다이샨의 지원 요청이 왔기에 패잔병 추격을 그만두고, 직속부대를 인솔해 마림의 북로군과 다이샨군이 맞서고 있는 곳으로 왔다. 누르하치는 북로군과 맞서고 있는 지점에 도착하고 나서 세심하게 지리를 살폈다. 마림의 본진 동쪽에 산이 있었고, 명군 본진은 참호 및 거마작으로 층층히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뒤에 화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명군이 참호를 파고 화기로 수비를 했기에 후금군은 아예 병사 절반을 말에서 내리게 한 후 앞의 거마작을 치우게 했고, 뒤에 반이 대기하고 있다가 거마작이 없어지면 바로 돌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쪽의 산을 장악해, 위에서 내려치는 형태로 싸우기로 하고, 여기에서도 산지를 확보하기 위해 병력을 내보냈다. 마림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 그 술수를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명군도 즉시 산으로 군대를 보냈고, 여기서 명군과 후금군이 대치했다. 이때 후금의 원병이 아직 모두 도착하지 않아 병력은 4,500명 정도 밖에 안되었고, 게다가 산에 오른 병력은 말에서 내려 모두 보병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병력수가 많은 명군이 우세를 보였다. 이때 누르하치의 주변에는 40~50명의 병력밖에 없었다. 바로 이 순간이 누르하치가 계획을 간파당해 사르후 전투에서 제일 고전한 순간이었다. 만약 5,000명의 분대를 거느리고 누르하치의 동쪽에 주둔했던 범종안이 이때 교전하고 있었던 마림의 본대를 지원했다면 누르하치는 양 측면에서 협공을 당해 크나큰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범종안은 움직이지 않았고, 마림군만이 누르하치와 동쪽 산에서 격돌했다. [[파일:external/jflmagazine.com/A-Fateful-Battle-2.jpg|width=350]] 이렇게 누르하치의 병력이 위기에 처한 순간 이를 지켜보던 다이샨군이 그대로 돌격을 감행해 명군 진영으로 돌입하니 싸움은 혼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후금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왜냐면 후금의 6기가 계속해서 싸움터로 달려와 후금군이 수적 우위까지 확보했기 때문이다. 마림군이 약 19,000명이었는데, 후금군 6기의 총수는 45,000명이었으니 이제 마림군의 화력이 우위라고 해도, 근접전에서는 별 효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림의 본진은 후금의 철기병에 유린당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마림이 호각지세로 나누었던 범종안이 마림군이 우세에 있었을 때도 구경만 했을 뿐 도통 구해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마림군은 붕괴했고, 참패하고 말았다. 다만 이 싸움에 대해 범종안과 마림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는 설이 정설이긴 하지만, 후금쪽 기록을 따를 경우 상황이 조금 다르다. 후금의 기록에 따르면 선전했다는 마림군은 이미 후금의 6기가 도착하기도 전에 산에서 누르하치군에게 격파당해서 후퇴를 하고 있었고, 후금의 6기가 도착한 것은 마림의 본영에 누르하치가 돌격해 들어갔을 때였다. 범종안이 마림을 구원하려 나왔다면 오히려 누르하치와 6기에게 싸먹혔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선전했다곤 하지만 애초에 마림군은 채 2시간을 버티지 못했을만큼 전투 자체가 급박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즉, 산에서 마림군은 범종안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격파되어 자신들의 본영으로 후퇴했고, 범종안이 구원할 타이밍에는 이미 후금의 6기가 도착하면서 마림군 본영이 휩쓸렸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후금의 6기만 일방적으로 전장에 증원되자 혼전양상에서 버티고 있었던 마림의 본대도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말았으며, 마림은 간신히 몸만 빼서 도주했다. 마림을 꺾은 누르하치는 곧바로 범종안의 분대에 싸움을 걸었고, 범종안군은 전투마차로 길목을 막고 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이때는 본래 계획대로 일부 부대를 말에서 내려 투입하는 전략으로 범종안의 명군을 손쉽게 전멸시키며 승리를 거두었다. 범종안은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북로군에는 명나라 편에 선 해서여진의 병력(예허부)도 많이 섞여 있었는데, 명군이 궤멸하는 것을 보고 싸우지 않은채 전장을 이탈해버렸다. 후금군은 북로군을 완전히 섬멸했고, 누르하치는 쉬지않고 다음 작전을 위해 부대를 재편성했는데, 목표는 유정의 동로군이었다. 한편 마림은 몇몇 부하들을 이끌고 겨우 자신의 주둔지였던 개원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마림은 이후 개원의 방위를 위해 몽골의 원병을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몽골 부족들은 명군의 참패를 보고 상당수가 후금에 붙어버렸다. 결국 개원은 사르후 전투 몇 개월 뒤 공략해온 후금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마림도 그때 전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